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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홍 『말뚝들』 서평 — “없던 일”이 되어버리는 것들에 대해

d 0_0 b 2026. 2. 11. 13:23

 

 

소설을 읽다가 “이거 뭔 말이지…?” 싶은 순간이 종종 있는데,
김홍의 『말뚝들』은 그 감정이 초반부터 확 와닿는 책이었다.

처음엔 그냥 스릴러처럼 시작한다.
근데 끝까지 읽고 나면, 이건 스릴러가 아니라 현실을 비유로 때리는 소설이었다.


1) 시작부터 이상하다: 트렁크 사건

주인공은 출근길에 남겨진 쪽지를 보고 트렁크를 확인하다가,
그대로 트렁크에 갇히는 사건을 겪는다.

이 장면이 무서운 이유는 단순히 “납치당했다”가 아니라,
그 순간부터 주인공이 딱 이런 상태로 떨어지기 때문이다.

  • 내가 뭘 해도 못 바꾸는 완전한 무력감
  •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느낌 (누군가가 “물건”처럼 옮기는 느낌)


그리고 그 말이 너무 노골적이지 않게, 23년식 K5와 같은 한국적인, 다소 생활적인 요소들로 몸으로 체감되게 들어온다.


2) 주인공이 갑자기 바뀐 것처럼 보였던 이유

트렁크 사건 이후 주인공이 좀 달라 보인다.
솔직히 처음엔 “갑자기 성격이 변하네?” 싶었다.

근데 읽다 보면 이건 “사람이 갑자기 착해졌다/각성했다”가 아니라,
한 번 무너진 다음에 예전 모드로 못 돌아가는 상태에 가깝다.

트렁크 전까지는 말뚝들이 그냥 뉴스 같았을 거다.
“세상에 그런 일이 있대~” 정도.

근데 트렁크 이후에는,
그 불행이 ‘남의 일’이 아니라 내 옆자리까지 올 수 있는 일이 되어버린다.

그래서 이후의 변화는 성장이라기보다,
정상으로 보이던 일상에서 빠져나온 사람의 균열처럼 느껴졌다.


3) 제일 어려웠던 비유: 왜 하필 ‘말뚝’인가?

처음엔 말뚝이 너무 낯설었다.
“말뚝이 왜 사람이고, 왜 울게 만들지?” 이런 느낌.

근데 말뚝이라는 물성을 떠올리면 조금씩 이해가 됐다.

  • 박혀서 안 움직임 → 바뀌지 않는 구조
  • 경계를 표시함 → 여기까지가 ‘정상’, 너머는 안 보겠다는 선
  • 버팀목 → 누군가의 희생 위에 일상이 올라가 있다는 느낌

그러니까 말뚝은 그냥 괴물 오브제가 아니라,

안 보고 지나갈 수 없게 만드는 물질.

 

 


4) “없던 일”로 기록되는 진술

개인적으로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이거였다.

트렁크 안에서 분명 뉴스(라디오)를 들었는데,
조사할 때 진술서에는 그게 없던 일처럼 적힌다.


이게 그냥 “기억 착오”로 끝나는 게 아니라, 이 소설의 핵심 메시지 같아서.

내 해석은 이렇다.

 

  • 공포 상황에서 기억이 끊기기도 하고,
  • 조사/문서라는 건 “남기기 쉬운 것만” 남기고,
  • 설명하기 애매한 감각은 시스템 속에서 삭제되기 쉽다.


현실에서 분명 있었던 일도, 기록에 남지 않으면 쉽게 ‘없던 일’이 된다.

결국 이 책은 말하는 것 같다.

 

 

이 책은 다 읽고 나서도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.
오히려 찝찝함이 남는다.

근데 나는 그 찝찝함이 이 책의 성공이라고 생각한다.

왜냐면 이 소설을 읽고 나면, 질문이 이렇게 바뀌기 때문이다.

  • “왜 이런 일이 나한테?”에서
  • “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데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지?”로

트렁크에 갇히는 일이 가장 의문이자, 질문으로 남으며 찝찝함과 페이지를 넘겼지만 결국 해당 사건은 갑작스러운 불행이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. 남의 일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주인공인 '쟝'에게 끌어오는 장치였던 것이다. 

 

 

『말뚝들』은 결국
체험과 기록 사이의 틈,
그 틈에서 지워진 것들을 다시 끌어올리는 소설이었다.